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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Korea/광주&목포 Gwangju&Mokpo

국립 518 민주묘지,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 가다

광주에서의 둘째 날 아침. 그리고 5월 18일 당일이 밝았다. 일찍 일어나면 전남대 캠퍼스도 한 바퀴 돌기로 했지만, 죄다 10시가 넘어서 일어나는 바람에 전남대는 다음에 가기로 하고, 518번 버스를 타고 민주묘지로 직행했다.

광주시내에서 국립 5.18 민주묘지까지 직통으로 쏘는 유일한 시내버스 518번. 민주묘지를 비롯해 수많은 5.18 사적지를 지나기 때문에 일부러 버스 번호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무등산행 1187번과 함께 광주시 시내버스 노선 부여방식을 따르지 않는 버스라고 한다. 노선번호에 적힌 의미를 되새기며, 버스 타고 40여분을 달려 국립 5.18 민주묘지 입구에 도착했다.

정류장에서 묘지 입구로 들어가는 길. 수많은 리본들이 걸려 있었다.

5.18은 현재진행형이다.

광주항쟁 40주년을 맞아 여야 원내대표를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들이 5월 18일 당일 이곳을 방문했다. 이들과 시간이 맞물리지 않아 묘지 참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곳곳에 경찰들이 쫙 배치되어 있었다.

코로나19만 아니었어도 정말 성대하게 행사가 치러졌을텐데, 또다시 아쉬운 부분이다.

국립 518 민주묘지 비석을 따라, 묘지 안쪽으로 뻗은 길을 걸었다.

이곳으로 들어가서 망월동 구묘역(망월공원묘지)까지 한번에 둘러볼 수 있었다.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의 묘지는 모두 구묘역 쪽에 있으니, 이곳에 갔다면 놓치지 말고 묶어서 둘러보는 것이 좋다.

국립 5.18 민주묘지의 정문 격인 민주의문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추모탑.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입구에서 발열체크와 손소독 과정을 거치고, 민주의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참배광장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놓인 흰 국화를 한 송이씩 가져가 시민 모두가 참배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5월 18일과 같이, 참배객이 몰리는 날에만 기획하는 행사 같았다.

우뚝 솟아있는 5.18 광주항쟁 추모탑. 실물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높아보인다.

추모탑 뒤편으로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이 잠들어있는 묘역이 쭉 펼쳐진다.

제단 앞으로 흰 국화들이 모여있었다. 광주를 기억하고 있는, 광주를 왜곡하려는 시도에 단호히 대처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증거다.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묘지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후에 정치인들 모이는 공식 행사가 시작되면 중앙으로 옮길려나보다.

묘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스러져간 수많은 시민들의 묘역이 이곳에 모여있다.

생각보다 빽빽한 밀도로 퍼져있는 묘역을 보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한두 명 죽고 끝난 게 아니라는 것, 그만큼 계엄군의 진압이 심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

희생자 묘역 하나하나에 대통령 명의의 작은 조화가 올려져 있었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전임 정부 때는 광주항쟁의 의미를 축소하기 급급했는데, 정부가 바뀌니 그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 애초에 진보 보수를 떠나 기본적으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게 정치인에 앞선 '사람'의 도리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선거 폭망하고 일시적인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이러는 건지, 진심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은 왜곡세력과 손절을 치는 것 자체로서 한국 보수진영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작업일테니.

많은 시민들이 묘역을 찾고 있었다. 5월 18일 당일인지라 간간히 취재진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광주항쟁 기간, 첫 사망자인 김경철 씨의 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구묘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슬슬 날이 후텁지근해지기 시작했지만, 여기 온 이상 구묘역을 놓치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천천히 이동했다.

큰길이 행사 때문에 막혀있어 묘역 뒷길을 따라갔다. 처음에는 돌아가야 된다고 궁시렁대긴 했는데, 가는 길이 꽤 초록초록하고 예뻐서 나쁘지만은 않았다.

공원화된 곳을 지나가서

또다른 시민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 구역을 지나쳐 쭉 이동했다.

이곳도 들어가보려고 했는데, 관계자들이 오늘 행사 때문에 못 들어간다고 해서 아쉽지만 발을 돌려야 했다. 정치인들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당일 내내 못 들어가게 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별수없이 국립 5.18 민주묘지 밖으로 빠져나와, 도로 하나를 건너 망월동 구묘역(망월시민묘지)에 도착했다.

넓은, 정말 넓은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어 처음에는 여기서 도대체 누굴 어떻게 찾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518 관련 희생자들의 묘지 구역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을 헤메고 있었는데 등 바로 뒤에 있어서 약간 허탈했다. 네 명이 갔는데 한 명도 찾지를 못하고 20분 동안 뺑뺑이 돌았다는 게 아직까지도 어이가 없...

돌탑 뒤편으로 들어가면 위르겐 힌츠페터와 민주열사들의 묘지가 보인다.

목숨 걸고 1980년 5월 광주에 들어왔던 위르겐 힌츠페터.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소개되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죽은 후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따라, 머리카락과 손톱 등 신체 일부를 이곳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해두었다고 한다.

힌츠페터의 묘역 뒤로, 민주화운동에 전념한 열사들의 묘역이 있었다. 묘지 하나하나를 둘러보며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백남기 농민의 묘역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5.18 광주항쟁의 주역 중 하나였던 박관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도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신호탄이 되었던 이한열의 묘역까지.

광주항쟁과 6월항쟁이 서로 단절된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묘역이 광주에 있는 것이 이상해할 일은 아니다.

후대에 이름이 알려진 이들 이외에도, 이름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의 묘역 역시 이곳 망월동 구묘지에 마련되어 있었다.

광주항쟁 당시 화이트칼라 계층뿐 아니라, 사회 하층민들까지 함께 시위에 참여했고, 공수부대는 사람 가리지 않고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하층민 희생자의 수 역시 상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신원파악은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고, 아직까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묻혀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 기억되어야 하는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행방불명자 65인 중 20인의 영정을 모신 공간.

아직까지도 518 희생자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데, 모두들 빨리 세상의 빛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정계와 시민사회에서 보낸 추모의 꽃을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와 망월동 구묘역 참배를 마쳤다.

묘지에서 빠져나가는 길에 본 망월동 시민묘역. 뙤약볕 아래 저 많은 묘역을 일일히 찾아다니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니...

아무튼 정말 큰 묘지구역이었다. 이 정도 사이즈의 공동묘역을 보는 게 처음이라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던, 그런 경험이었다.

참배를 마치고, 다시 시내로 돌아가려면 민주묘지 정류장까지 돌아가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망월동 묘지 공터에 매월06번 버스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막 출발하려는 차를 운 좋게 붙잡아 타서, 금남로 시내까지 불편함 없이 한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매해 5월 18일 당일에만 운행구간을 국립 5.18 민주묘지와 망월동 구묘역까지 연장하는 버스라고 한다. 시내에서 출발할 때도 민주묘지까지 간다는 뜻이니, 배차간격 꽤 긴 518번을 무작정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

망월동 구묘역 공터를 출발해 5.18 민주묘지 정류장 한 곳만 거치고, 시내 초입까지 무정차로 운행하는 매월06번. 매해 5월 18일에 민주묘지를 찾는다면, 버스 타기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아예 놓고 가도 될 것 같다.

이곳에서 충효188번을 타면 담양 가사문학관과 소새원까지 환승 없이 직통으로 갈 수 있으니, 여행코스 짜는데 참고하시길.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자들을 온몸으로 기억할 수 있는, 그런 공간. 광주에 왔다면 빼놓지 말고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가 이곳 민주묘지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버스를 타고 국립 5.18 민주묘지를 빠져나가면서, 여러 생각을 품은 채 오전 일정을 마무리했다.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