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시가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현실 속에서 심시티를 구현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구획되고 정돈된 모습을 뽐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에익샴플레 지구(Eixample)를 필두로 한 시내의 중심지는 더더욱 가운데 구멍 뚫린 팔각형들을 가지런히 박아 두었다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위 사진은 구글 어스에서 캡처한 사진이다. 시내 북쪽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디아고날(Diagonal) 거리, 시내의 동서를 구분짓는 그라시아(Gracia) 거리를 기준으로, 만사나(manzana)라고 부르는 주택 블록들로 도시가 꽉 채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자리가 죄다 45' 각도로 깎인 듯한 모습을 가진 이 만사나는 한 변이 113m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의 건물이 6층을 넘기지 않는 주택들로 구성된 일종의 블록(지구)다. 블록의 중앙 부분은 뻥 뚫려 있어, 블록 안 거주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바르셀로나에 높은 건축물이 그리 많지 않다는 특성 상 육안으로 빽빽하게 정돈된 만사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외곽의 산지, 혹은 티비다보에 올라가면 바르셀로나의 도심, 그리고 만사나의 모습을 조금 선명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아래 사진처럼, 티비다보의 명물인 관람차 뒤로, 빽빽한 건물 사이 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가 수직으로 교차하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당연히 이러한 모습이 자연적으로 갖춰졌을 리는 없다.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도시 전체를 설계한 사람이 없었다면 이렇게 독특한 도시경관이 탄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였을까. 바르셀로나의 건축은 흔히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가우디와 연결지어지지만, 만사나 블록을 설계한 장본인은 가우디가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설계자는 바로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라는 건축가. 가우디 이전에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바르셀로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는 일데폰스 세르다의 모습)
바르셀로나 역시 과거에는 여타의 유럽 도시처럼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바르셀로나는 점점 과포화된 도시로 변해가 각종 도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파리보다 인구밀도가 2배 이상 높았다 하니, 말 다 했을 지경.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은 꾸역꾸역 들어오다 보니 페스트와 같은 질병이 창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른다. 이에 바르셀로나 시는 성곽을 허물고 새로운 도시계획을 세우려는 계획을 수립했고, 공모전에서 일데폰스 세르다의 계획이 당선된 것. 이렇게 하여, 1868년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바르셀로나를 건축하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일데폰스 세르다의 원래 계획은 현재의 만사나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구조였다. 19세기 후반은 질병과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시대였다. 그랬기에, 일데폰스는 모든 사람이 쾌적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도시설계의 목표로 잡고, 만사나 속에서 여러 공공공간을 설계했다. 그의 설계 속에서, 만사나는 지금과 같은 폐쇄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네 면 중 세 면만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트여 있는 가운데는 공공 정원으로 꾸며 시민 누구나 그곳에서 휴식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만사나에 살든 살지 않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열린 공간에서 일상을 즐길 수 있도록 구상한 것. 그의 설계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을 만들어나가려는 과감한 시도였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시도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도시를 살아가는 여러 계층들의 이익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 시기를 거치며 굉장히 폐쇄적인 형태로 변모한 것. 이 때 지어진 건물들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와, 지금의 '골목감성' 가득한 바르셀로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역시 만사나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는 등, 도시의 기본 뼈대를 세운 사람은 분명 일데폰스 세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설계 마무리를 본인 돈으로 메꿔야 해 훗날 일데폰스는 무일푼이 되는 어이없는 일도 발생하긴 했지만...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바르셀로나를 바라보면 훨씬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단순히 '예쁘게 생겼다' '신기하다'를 넘어, 도시의 역사를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 지금까지 바르셀로나를 가우디의 도시로 기억했다면, 이제부터는 일데폰스 세르다라는 이름도 기억하며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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