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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Germany/뮌헨&근교 Munich&Outskirts

20200118.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의 기억

뉘른베르크는 뮌헨과 더불어 바이에른 주의 핵심 도시 중 한 곳이며, 히틀러의 족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치 전당대회장, 제펠린 비행장,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 세 곳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대표적인 관광지인데,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이 바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은 구시가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퓌르츠 방면으로 가는 U반 타고 10분 정도 외곽으로 빠져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접근성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티켓으로 뉘른베르크 U반도 이용할 수 있으며, 애초에 뮌헨이건 뉘른베르크건 U반 안에서 표 검사 하는 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무임승차는 지양합시다

여긴 특이하게 매주 화요일이 정기휴일. 나머지 날에는 오후 6시까지 문을 여는데, 낮에는 구시가지에서 놀다가 저녁 어스름(이라고 해봤자 겨울에는 4시 정도)에 여기 들러서 2시간 둘러보고 시내로 돌아가는 동선을 짜면 좋다.

겨울 해가 정말 짧은 유럽의 특성상, 실내 관광지가 6시까지 오픈하는 건 정말 큰 행운인 것이다. 돌아보는 데는 최소 1시간~최대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유럽사에 관심이 많으며 영어에 능통할 경우 2시간 갖고는 모자란다.

입장료는 국제학생증을 소지한 대학생 기준 1.5유로.(일반 성인은 5유로)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만, 이런 곳이라면 세금으로 때워서 무료개방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교육의 공간을 유료개방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현금뿐 아니라 VISA, 마스터카드, 아멕스, JCB 그리고 유니온페이 신용카드 결제까지 지원한다. 독일에서 유니온페이 카드 받는 곳 여기서 처음 봤다.

총 4층 구조의 전범재판기념관. 실제로 관광객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은 2층의 600호 법정(실제 전범재판이 이루어졌던 곳)과 3층의 전시실이다.

0층과 3층에는 무료 화장실이 있는데, 상당히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어 이용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0층과 2층에 있는 무료 물품보관함. 전시실 안이 은근히 덥고, 계속 돌아다니면서 구경해야 하기 때문에 가방과 외투는 엄청난 짐이 되기 십상이다. 필요없는 짐을 이곳에 집어넣고 가면 훨씬 쾌적하게 전시실을 돌아볼 수 있다.

1유로 혹은 2유로 동전을 넣고 열쇠를 돌려 잠그고, 물품을 꺼낼 때 다시 동전을 반환받는 시스템이니 나갈 때 동전 챙기는 거 잊지 말자.

입장권 사면서 받은 영어 오디오가이드(대여비 따로 없다)를 목에 걸고 두 층을 올라가 마주한 600호 법정. 지금도 가끔 여기서 실제 공판이 이뤄지기 때문에 타이밍 안 맞으면 안에 못 들어가본다고 한다.

대충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가 어떻게 만들어졌었나 하는 설명들을 뒤로 하고, 코트룸 안으로 입장한다.

넓게 펼쳐지는 공간. 옆으로 미국인 단체관광객이 한가득 들어와 가이드 설명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슬쩍 옆에 끼어서 가이드 말 들어보려다가 너무 속사포여서 포기.

아직까지는 오디오가이드 수준의 빠르기가 딱 적당한 토종 한국인이다. 업그레이드하려면 해외로 교환학생이라도 가야지...?

암튼 한 10분 정도 법정 안에서 멍때리고 있다가, 전시실이 위치한 곳으로 올라갔다.

2차대전 당시 나치가 했던 만행들, 그리고 전범재판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단죄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한 이 전시실은 대부분의 설명이 독일어로만 되어 있다. 영어 오디오가이드를 무료로 빌려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빨간색으로 칠해진 숫자를 오디오가이드에 입력하면 영어 해설이 나오는데, 말 알아듣기 매우 어렵다. 따지자면 대학교 교재로 쓰일법한 사회과학 서적에 등장하는 수준의 어휘와 문장을 그대로 읽어주기 때문에, 한 30분쯤 듣다가 보면 머리아파서 돌아버릴 지경.

어찌어찌 붙잡고 머릿속에 지식을 흡수하려 노력했지만... 1시간 30분이 지나자 과포화되어버린 뇌 덕분에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돌아오지는 못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독일군 전범들의 만행을 입증해 줄 문서들을 뉘른베르크로 옮길 때 사용되었던 박스도 전시되어 있다.

전범재판 당시의 600호 법정을 찍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으며

나치즘의 선봉에 섰던 자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죄목으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정리한 자료도 있다.

히틀러와 히믈러, 괴벨스 같은 거물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자살하신 덕분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오르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우리도 알 법한 거물은 괴링밖에 없다.

재판 중 전범들이 앉았던 의자까지 떼와서 기억하고 있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 하여간 나치즘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반성의 자세를 보여주는 독일이다.

얼마 전에는 튀링겐 주 총리로 선출된 네오나치 계열 정당 AfD 소속의 후보가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자진사퇴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총리직 당선까지 '절차적인 문제'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정당들과 시민이 연정 거부를 선언했기 때문인데, 독일 사회에서의 나치즘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이웃나라 어딘가와는 사뭇 다른 태도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독일도 따지고 보면 과거사 청산에 있어 썩 깨끗하기만 한 건 절대로 아니다. 이건 포스팅 끝무렵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600호 법정에 전기를 공급하던 장치. 뭘 이런 것까지 보존해두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가 보면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 휴식처같은 존재다.

100페이지동안 전공지식이 줄글로 쏟아져나온 후 나오는 한 페이지의 만화같은 존재랄까. 아무튼 반갑다.

그리고 등장하는 일본관. 이런 전시를 도쿄에서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3차대전 터지고 다시 원폭 몇 발 맞으면 그때서야 과거의 행동을 참회할라나.

독일 역시 과거사에 대해 '선택적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 식민지에 가했던 행동들을 '합법적'이었다고 정당화하며, 히틀러가 그리스와 집시에게 가했던 학살에 대해서는 유대인에게 했던 것과는 너무나 차이를 두고 접근하고 있으니까. 이런 것을 보면 국제정치에서 정의와 당위가 갖는 의미가 참 별 것 없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최소한 독일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시대를 옹호하며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는 신사에 국가수반이 공물을 보내고, 정치인들이 단체로 참배를 가는 짓을 오늘날까지 자행하는 우리의 이웃과는 사뭇 다른 태도. 하여튼 보면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너무나 잘 넘는단 말이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시장. 오늘날까지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탄압하는 독재자들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하면서 대장정을 마친다.

국제정치, 국제법, 그리고 그 안에서의 정의 등등 복잡한 생각을 머리 안에 집어넣고 나오게 되는 장소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볼 공간은 절대로 아닌 게 확실하다.

나가는 길에 찍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념관의 사진. 마음의 짐을 한가득 안은 채로 다시 뉘른베르크 중앙역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뮌헨으로 돌아왔다.

덧) 히틀러의 재등장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국가경제나 국제적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을 때는 더더욱 파시스트의 등장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특정 집단을 악마화해 혐오발언을 쏟아내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불안심리를 증폭해 지지도를 높이려는 시도는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잘 들어먹힌다. 이성보다 본능적으로 작동되는 우리 내면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공포심에 넘어가지 않고, 냉철하게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성찰의 힘으로 그들의 달콤한 꾐에 넘어가지 않는 것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이해 하에서만 가능할테니 말이다.

아무튼 참 어렵다. 직접 와서 두 눈으로 현장을 보고, 잘 생각해보시길. 이런 의미에서 뉘른베르크에 갔다면 정말 방문을 추천하는 장소다.